색으로 번안하기
다채로운 색으로 가득한 캔버스에는 작가가 다시 읽어낸 대상 또는 내면의 심상이 펼쳐져 있다. 색을 이용해 기존 개념이나 사적 경험을 재해석하고, 의미를 가진 특정 색상을 단일하게 사용함으로써 작품 속 메시지를 강화하는 한편, 존재하는 모든 색을 모두 펼쳐보임으로써 우리가 쉽게 다다를 수 없는 공간이나 욕망과 충동, 공포가 뒤섞인 가상의 세계를 제시한다.
고낙범과 백요섭은 명화나 기억 등 작가가 선택한 대상을 색 자체를 이용해 코드화하는 작업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세현과 정직성은 < 빨강 Red >과 < 파랑 Blue >이라는 단일 색상을 이용하여 아름답지만 불온한 풍경이나 역동적인 삶의 작동방식이 스며든 장면을 그린다. 최은정과 심우현은 각기 현실에 존재할 것 같지만 존재하지 못하는 < 헤테로토피아 Heterotopia >와 유년 시절의 강렬한 경험을 재현하기 위해 병치될 수 없는 여러 색을 직조하여 화면 속 공간에 환상성과 역동성을 더한다. 우리는 작가의 언어로 채택된 색을 통해 재해석된 세상을 만날 수 있다.
소거된 시간과 흔적의 공간
흑과 백, 그사이에 촘촘하게 나열된 무채색들은 무언가 생기고 사라진 자리에 남겨진 흔적과 흘러간 시간을 기록한다. 마른 식물과 오래된 방의 빛바랜 벽지, 쓸모를 다 하고 남겨진 우산의 절제된 색은 보는 이가 화면 속 시간의 흔적을 관조적으로 바라보게 한다. 흑백의 이미지는 보는 이가 각자만의 기억을 투영하고 또 다른 색과 감각으로 채워 넣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윤석원은 명도와 채도가 낮은 색으로 그린 마른 식물을 통해 생명과 죽음 사이의 다양한 층위를 보여주고 사라져간 것들에게 위로를 전한다. 장재민은 절제된 색을 사용해 자신이 경험했던 장소에 사후적 의미를 부여하고, 이재삼은 목탄을 여러 번 문질러 검은 공간을 구현하는 수행과정에서 내면의 풍경을 재현한다. 흑백사진을 다루는 김중만이 고독과 심연을 어두운 색채로 표출했다면 민병헌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사소한 것에서 발견할 수 있는 시간의 흐름을, 임수민은 잊혀가는 존재를 기억하기 위한 방식으로 거리의 모습을 담아냈다.